[Today’s Keyword] 미국의 인플레이션, 한국의 인플레이션

2025년 12월 4일, 세계 경제의 눈은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이라는 키워드에 쏠려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의 급격한 금리 인상기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으나, 이제 인플레이션 논의는 주요국의 부채 문제, 기술 패권 경쟁, 지정학적 리스크와 얽히며 한층 더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경제가 보내는 상반된 신호는 연방준비제도(Fed)의 정책 경로에 대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으며, 이는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한국 경제는 대외 파고를 넘어서는 동시에, 잠재성장률 하락이라는 구조적 과제에 직면한 상황입니다.

 

인플레이션의 새로운 변수, ‘정부 부채’라는 그림자

 

최근 인플레이션 논의의 가장 큰 변화는 그 원인을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주요 선진국의 ‘재정 건전성’ 문제로 확장하여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정부 부채가 팬데믹을 거치며 급증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래 세대의 부담을 넘어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정부가 막대한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면 시장 금리는 자연스럽게 상승 압력을 받게 됩니다. 이는 기업의 투자 비용과 가계의 이자 부담을 가중시켜 실물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중앙은행이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펼치기보다 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즉 ‘재정 종속’ 현상이 심화될 경우 물가 안정이란 최우선 목표가 흔들리며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위험이 커집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재정 위기 가능성이 거론되는 현상은 이러한 우려가 더 이상 가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관련 글: [Today’s Keyword] 통화량 증가에 따른 환율과 인플레이션, [Today’s Keyword] 미국의 통화량, 한국의 통화량)

 

미국의 딜레마: 상충하는 경제 신호와 연준의 셈법

 

현재 미국 경제는 시장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동시에 보내며 연준의 정책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완화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지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공급관리협회(ISM) 제조업 지수 중 ‘지불 가격 지수’가 7개월 만에 최저치로 하락하고, 고용 시장이 둔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은 연준이 더 이상 공격적인 긴축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시장은 이를 “나쁜 소식(경기 둔화)이 곧 좋은 소식(금리 인하 기대)”으로 받아들이며 안도하는 분위기입니다.(관련 글: [Today’s Keyword] 의도된 침묵)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AI 기술 경쟁이 불러온 ‘치플레이션(Chipflation)’입니다. AI 서비스에 필수적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칩의 공급 부족이 심화되면서, 이는 단순한 부품 수급 문제를 넘어 전반적인 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HBM 시장의 공급 부족이 글로벌 거시 경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는 기술 발전이 예기치 못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 정책 역시 중요한 변수입니다.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인하 소식은 우리에게 단비와 같지만, 전반적인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여전한 위협입니다. OECD는 미국의 관세 인상이 최종 소비재 가격에 전가되어 수 분기 동안 인플레이션을 추가로 상승시킬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외부 파도 속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과제

 

이처럼 복잡한 대외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는 저점을 지나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는 긍정적 진단과 구조적 취약점에 대한 우려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방향은 미국의 행보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시장 참여자들 역시 미국의 인플레이션 지표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입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 즉 잠재성장률의 하락입니다. 최근 OECD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사상 처음으로 2%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은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성장의 최대치가 낮아졌음을 의미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원화 가치의 구조적 약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통화 공급 속도 차이와 맞물려 원화 가치가 하락하며 실질 구매력이 떨어지는 “벼락거지” 현상에 대한 우려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희망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AI를 중심으로 한 기술 혁신과 산업 정책에 투자를 확대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하는 노력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멕시코의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해외 생산기지의 비용 상승 요인이 발생하는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이 풀어야 할 과제 또한 산적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를 넘어 정부 부채, 기술 패권, 지정학적 리스크가 복잡하게 얽힌 고차방정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통화 및 관세 정책 변화를 면밀히 주시하며 단기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AI와 같은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 경제의 근본 체력을 강화하는 장기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